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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추씨 봉양사(鳳陽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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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7회 작성일 20-03-02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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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심당 추수경(洗心堂秋水鏡) 10세조께서 명나라 무강자사(武康刺史)로 계실 때, 조선이 왜적에게 침략을 받아 무참히 짓밟히는 참상에 분개하여 모든 영화를 버리고 황명(皇明)의 총병아장(摠兵亞將)으로서 고국의 구원을 위하여 출병, 국토회복에 빛나는 훈공을 세우고 1600년 전주 군영에서 순국하신 충장(忠將)의 묘소가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실전(失傳)된 뒤 250여 년이나 버림 받은 비극을 겪었다.
 세심당께서 별세하자 선조(宣祖) 대왕은 그 은공에 감사하여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을 추작(追爵)하고 예조참판을 보내어 어제(御製)의 치제문(致祭文)을 읽게 하였으며, 장군이 순국한 마을을 추동(秋洞)이라 부르게 하여 정중한 예장(禮葬)을 베풀도록 하였다.
 그 뒤 묘역에는 사당으로 봉양재(鳳陽齋)가 건립되어 해마다 제향을 드렸는데, 1636년(인조 14년) 청나라의 제2차 침입(병자호란)때 전화를 피하여 후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가는 바람에 묘소를 돌보지 못하여 오랫동안 방치된 끝에 생긴 일이다.
 그런데 대구에서 1853년(철종 4년) 500년 이상이나 실전되었던 노당 추적(露堂秋適) 3세조의 묘소가 읍지(邑誌) 등을 참고로 수소문한 끝에 발견됨으로써 추씨 가문에는 위선사(爲先事)에 활기가 붙었다. 얼마 후에 유림(儒林)의 협조와 더불어 인흥서원(仁興書院)이 건립되고, 1883년에는 완산부원군의 다섯 자제 분들이 묻혀 있는 전라도 나주 시랑동에 여재각(如在閣)이 사당으로 세워졌으며, 세심당 10세조의 묘소를 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치자 추세문공의 선도(先導)로 완주(全州)를 중심으로 전라, 충청지역의 후손들이 심묘(尋墓) 작업을 철저히 벌인 결과, 1887년 무렵 마침내 완주군 봉상면에서 세심당 10세조의 무덤을 찾아냈다.
 추계추씨 계유보(癸酉譜)에 따르면 그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전한다. 1890년 7월에 봉양재 건립을 위하여 가문에서 유사직(有司職)으로 추원규(秋元圭)공을 임명하였는데 서장(書狀)의 내용을 보면 `선조 세심당 완산부원군묘하 영건소 유사 추원규(先祖洗心堂完山府院君墓下營建所有司秋元圭)'라고 적혀 있다. 숭정(崇禎) 기원(1629년) 후 261년이 된 경인년(庚寅年, 1890년)의 일로, 원규공은 훗날 광무(光武) 7년(고종 41년, 1903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으로 임명되었던 분이다. 그는 세심당 할아버지의 막내 아들인 응향당(凝香堂)의 10세손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세심당 추수경 장군의 사당과 묘역은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세심당 추수경 장군님 묘소) 
 (묘역 입구에 있는 하마비) 
 복원된 세심당 10세조의 그 묘소와 봉양재는 일제시대에 또 수난을 겪게 된다. 임란 때 명나라 장군묘라 하여 일인들에게 극심한 학대를 당하였다. 석물을 파괴하여 땅에 묻고 묘역에는 도로를 내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위토(位土)를 빼앗아 제사도 올리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황폐화된 묘소는 8·15 광복 후 10년이 지난 1956년에 이르러서야 전라남도 장흥(長興) 문중의 추용희(秋鏞禧) 종친이 나섬으로써 옛 모습을 복원(復元)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호남 일대를 수소문하여 여수군(麗水郡) 돌산면(突山面)에 서 큰 규모의 전통 가옥을 사들여 봉양재를 재건하였으며 이때 신도비가 설치되었고 1975년에는 진안의 추용남(秋鏞南) 종친이 격식을 갖춘 묘비를 세웠다. 용남 종친은 영향당의 11세손이다.
 투철한 숭조(崇祖) 이념을 가진 후손에 의하여 복원된 봉양재는 1980년 폭우와 관리상의 불찰로 인하여 다시 수난을 겪었다. 봉양재가 도괴 상태에 직면함으로써 대대적인 보수를 하지 않으면 사당으로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를 기화로 엉뚱한 현상이 벌어졌다. 충청남도 부여에 사는 종인 한 사람이 봉양재의 재목을 자기 고장인 부여로 운반하여 `충현사'라는 이름의 사당을 짓고, 고종(高宗)께서 하사한 명나라 무장(武將) 모습의 추수경 장군 영정도 그곳으로 가져가 사당에 걸었다.
 이래서 다시 황폐화된 훌륭한 선조님의 묘역을 바라보는 후손들의 심정은 자괴감을 금할 수 없게 되었다. 하여, 1990년대에 추계추씨 대종회가 태동하면서 세심당 10세조의 묘역 복원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회장으로 추대받은 추경석 전 건설교통부 장관이 적극적인 활동을 벌임으로써 임란 때 혁혁한 무공을 세운 추수경 장군의 뚜렷한 사적에 근거하여 문화재로 마땅히 인정해야 된다는 심사 결과에 따라 1998년 1월 9일 전라북도 문화재 제94호로 지정받게 된 것이다.
 그 뒤 행정자치부와 전라북도, 그리고 완주군의 각별한 배려로 자금의 뒷받침을 받아 봉양재는 위용을 자랑하는 남휘문(覽輝門)과 더불어 예전보다 더 웅장한 전통양식의 사당이 건립되었다. 거기에 후손들의 정성으로 호석(護石)과 석의(石儀)를 갖춤으로써 충장 추수경 장군 묘역의 성역화(聖域化)는 완성되었다. 이 선영사업을 마무리하는데 추병직 건교부장관의 협조가 적지 않았다.
 여기에 조선조의 정1품 완산부원군으로서 무신(武臣)의 조복(朝服)으로 위의를 갖춘 영정이 봉안되었다. 동강(東江) 권오창(權五昌) 화백이 당시의 고증된 복제에 따라 정성들여 그린 영정이다. 추계추씨 400년의 숙원은 이렇게 풀렸다. 그리고 문화재 당국에서 격을 높여 봉양사(鳳陽祠)라 부르게 하였다.
 돌이켜보면 완산부원군 세심당 추수경 10세조의 묘역사(墓域史)는 나라의 운명과 함께 파란만장한 기복을 겪어 온 셈이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영원한 안식처에서 고이 쉬게 되셨다.

제사일 : 음3월3일
 주소지 : 전북 완주군 봉동읍 은하리 추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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