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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최씨 쌍충문중 쌍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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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상연 댓글 0건 조회 3,668회 작성일 14-04-25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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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南固城, 雙忠門中과 雙烈婦

.....宗家探訪으로 안렴사공파 후손의 집성지인 경남 고성 낙동의 종가를 찾아 쌍열부의 사연이 애틋한 감동이기에 본 회보에 龜鑑으로 揭載한다....註 編輯者.

[경상남도 고성군 구만면 낙동 어구에 오석(烏石)에 새겨진 다섯 자 높이의“全州崔氏雙烈婦碑”가 고고히 서 있다, 이 비(碑)는 전주최씨 안렴사공파 22세 曉瑱公의 夫人 載寧李氏와, 아우 翰鎭公의 夫人 晉陽河氏의 婦烈이 새겨진 비이다.  三從의 美德인 女必從夫의 원리를 쫓아 知와德을 갖춘 賢母良妻로서 夫君을 따라간 애절한 두 분 烈婦의 장거를 칭하여 雙烈婦라 하였다. 이 碑文은 世人의感動이 아닐 수 없다.


 *曉瑱公의 夫人 載寧李氏는 고려말의 수절충신(守節忠臣)인 隱 李午선생의 후예로 名門家에서 女行의 법인 三從의 道를 어려서부터 익히고 닦은 뒤 고성군 구만면 낙동 전주최씨문중의 宗婦로 出嫁해왔다. 부인 이씨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몸가짐과 바른 지혜로 시부모님의 봉양은 물론 매사에 바른 행동으로 현모양처로서의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높은 추앙을 받는 德行이 고성고을의 칭송이었다.
 그러나 부군 효진공이 병을 얻어 날로 악화만 되어가는 병세를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정성을 다해 간병을 하였으나 정성도 아랑곳없이 마침내 운명하고 말았다.
 이때에 공교롭게도 부인이씨는 임신 중에 있음을 한탄을 하며  여필종부란 삼종의도를 어기고 부군의 뒤를 따르지 못했음은, 年老하신 媤父母님이 생존해 계실뿐더러 大宗家의 宗婦로 絶孫의 큰 罪를 범할 수 없는 일념이 자진을 단념 하게 된다.
 
 夫君의 장례를 치른 엿새 만에 부인은 옥동자를 출산하게 되니 家門의 기쁨은 말할 수 없는 경사였고 어린 遺腹子는 부인의 정성어린 양육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말을 배우고 걷기를 시작하니 어느덧 夫君의 大祥을 맞아 치르게 된다. 부인은 시부모님을 뵙고 하는 말이 “아버님 어머님, 우리 아이가 이처럼 건강히 잘 자랐으니 이젠 이 어미가 없어도 훌륭하게 자랄 수 있겠죠?”하는 것이었다. 이 말에 시부모께서는 자식의 어엿함을 대견스러워하는 줄로만 알고 만족한 듯 웃으면서 “암 이렇게 컸는데 어미 없이도 크고 말구” 하고 무심히 대답한 것이 청천 벽력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씨부인은 그날 밤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단정히 한 다음 家廟에 들러 四拜올린후 부군을 따르지 못한 죄 백배사죄하고 그 길로 자결을 하였다, 그때 나이 24세였다.

운명하신 후 장롱 속에서 발견된 遺書에 친정 부모님께 드리는 것과 아들이 성장한 뒤 보라는 유서에 “나는 너를 낳아서 이만치 키우기 위해 三從의 道를 어기고, 부질없는 목숨을 오늘에 까지 이어왔으니 어미의 애달픈 심정 깊이 새겨 이해하고 훌륭하게 자라서 崔氏大宗家의 宗孫으로서 名門의家統을 명예롭게 이어가도록 하여라.”라는 글을  남겼다. 장롱에는 이 아들이 나이 따라 철따라 입을 수 있는 옷들을  손수 지어놓고 일일이 기록해놓았으니, 이것을 보는 사람들의 감동은 어찌했으랴....참으로 훌륭한 婦德, 婦功 이 아닐 수 없다.

*翰鎭公의 夫人 晉陽河氏, 한진공은 효진공의 아우로 효진공의 대상을 치른 후 우연찮게 시름시름 앓다가 점점 병세가 호전되지 않고 악화되기 시작하여 부인 진양하씨는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명의를 찾아 치료를 해도 좀처럼 낳을 기미가 없어 몇날며칠을 치성으로 공을 들이고 기도로 정성을 다하였으나 至誠의효험도 없이 결국 운명하셨다.
 부인 하씨는 아무런 흐트러짐이 없이 절차에 따른 장례를 치르고 뒷일을 주선하고 감독하면서 시부모님을 위로하는 여유로 빈틈이 없었다.
 그런데 하씨부인은 부군의 장례하루전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빈청에 들러 친정 부모님께 유서를 남기고 어디서 구했는지 고염수를 마시고 자진하였으니 부인의 나이 꽃다운 21세였다.

 부인 진양하씨는 仁祖朝의 名賢 台溪 溍의 후예로 世人의 우러름을 한 몸에 받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열부 두 분을 일컬어 세상 사람들은 義敏, 義肅 두 분 선조는 雙忠이요, 두분 열부는 雙烈이니, 雙忠家門에 雙烈婦로 칭송이 되니, 고성군 구만동에 “전주최씨쌍열부” 의 旌門을 胃孫인 仁鎬가 竪碑하여 後世에 龜鑑이되게 하였다.
 그러나 선연했던 비문은 긴 세월의 시달림에 퇴색되어 보기에 민망스러웠고 시대의 흐름은 지역개발이란 미명하에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비각자체가 묻힐 지경에 이르게 되니 증손 治煥이 오석으로 비석을 다듬어 새로이 하고 저지대에 묻힐뻔한 비를 복토를 하여 세우니 후손의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새 비의 碑文은 晉山人 河謙鎭선생이 짖고 글은 咸安人 李鎭玉선생이 썼다.
                                                                  편집인  雲吉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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