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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인흥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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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추영현 댓글 0건 조회 3,667회 작성일 14-08-21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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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광역시 달성군 화원읍(達城郡 花園邑)에 있는 인흥서원은 고려 충렬왕 때의 명신(名臣) 문헌공(文憲公) 노당 추적(露堂秋適)선생을 비롯한 추씨의 현조(顯祖) 네 분을 봉안한 서원이다.

 서쪽에서부터 문정공(文正公) 회암 추황(悔庵秋篁), 문헌공 노당 추적(露堂秋適), 상서공(尙書公) 운심재 추유(雲心齋秋濡), 완산부원군 충장공(完山府院君 忠莊公) 세심당 추수경(洗心堂秋水鏡) 네 신위를 모시고 있다.

 조선 철종 12년(1861년) 10월 3일 팔도유림(八道儒林)과 노당 선생의 20세손인 추세문공에 의하여 기초가 닦이고 1866년 9월 20일 창건되었다. 총면적 3,861 평방미터, 경내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외삼문(外三門)인 숭봉문(崇奉門) 3칸이 있으며, 서원 전면 좌, 우에 요산료(樂山寮 또는 요산재), 관수란(觀水欄 또는 관란재) 건물이 동 ^ 서로 건립되어 있고, 내삼문으로 추모문(追慕門), 네 분 현조를 봉안한 문현사(文顯祠), 1869년 기사 인흥재사본(己巳仁興齋舍本) 명심보감 판각 장판각(板刻藏版閣)이 있고, 입구에는 노당 선생의 신도비각(神道碑閣)과 신도비가 있으며, 남쪽으로 700미터쯤 떨어진 위치의 산기슭 언덕에 문헌공의 묘소가 있다.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書院撤廢) 때에도 훼철되지 아니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으나, 인흥서원 역시 1869년을 전후하여 사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헐리고 폐허가 되었다. 이 사실에 대하여는 1877년 대구 도호부판관 김유현(金有鉉)이 쓴 인흥서원 부조묘개건기(改建記)에 “1875년 가을 외람되게 이 고을 군수로 부임하게 되어 하차한 즉시 찾아 방문했더니, 서원은 이미 훼철되어 버린 후였고 묘소와 부조묘만이 아직 그전대로 있었다” 라고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후손 진사 추교석(秋敎晳)공에 이르러 1933년부터 서원의 복원(復元)을 꾸준히 추진하여 1938년 무인 3월 중정에 300여 명의 유림(儒林)과 자손이 참여한 가운데 복향(復享)의 대업을 완수하였으며 지역 유림에서는 이가호(李家鎬 : 퇴계 이황의 13대손) 류도승(柳道昇 : 서애 류성룡의 후손) 등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다.

 근래까지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는 건물 중에 부조묘(不?廟)가 있는데 추씨 가승(秋氏家乘)의 별도(別圖)를 보면 현 서원 강당 건물의 서편에 불천지위(不遷之位)의 문헌공 노당 추적 선생과 완산부원군 세심당 추수경 장군의 부조묘(不?廟)가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이 부조묘의 복원이 필요하다.

 인흥서원 강당의 동쪽의 방을 모학당(慕學堂)이라 하고 서쪽 방을 존학당(尊學堂)이라 하였다. 그리고 서원 강당 앞 동재(東齋) 현판에는 요산료(樂山寮)라고 쓰여 있으나 서원 창건 당시에는 요산재(樂山齋)라 하였으며, 서재(西齋) 역시 현재의 현판에는 관수란(觀水欄)이라 하였으나 본래는 관란재(觀瀾齋)였음을 서원 강당에 비치된 인흥서원 명당재기(名堂齋記)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또 명당재기에는 동재를 관란, 서재를 요산으로 적어 놓았으나 현재는 서로 바뀌어 부착되어 있다.

 논어(論語) 옹야(雍也)편 공자 말씀 중에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仁者樂山)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 한다”에서의 요산이며, 관란(觀瀾)이란 맹자(孟子)의 진심장(盡心章)에 “관수유술 필관기란 일월유명 용광필조언(觀水有術 必觀其瀾 日月有明 容光必照焉)”이라 하여 “물을 보는 것이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결을 볼 것이며, 해와 달이 밝음이 있으니 빛을 용납하는 곳에는 반드시 비추어 준다”함이 관란(觀瀾)이란 말의 출처이다.

 현재의 동, 서재 편액 글씨는 한말의 서예가로 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한 안동인 김성근(金聲根)공이 쓴 것이다.
 추씨 사현조(四顯祖)를 모신 사당 재호(齋號) 역시 현재 문현사(文顯祠)라 되어 있으나 당초에는 존친사(尊親祠)라 하였다. 그러나 문현(文顯)이라 함은 회암(悔庵) ^ 노당(露堂) 두 분에게 어울리는 것이고, 운심재(雲心齋) ^ 세심당(洗心堂)은 무(武)를 겸비한 인물임에 다소의 차이가 있다 할 것이다.

 사당 문 위에 거는 당호(堂號)와 액자를 명명해 주신 분은 동산 이민덕(洞山李敏德)공이었고 편액(扁額) 글자를 써준 분은 상서를 지낸 신석희(申錫禧)공과 이원조(李源祚 : 공조판서 역임)공 응교(應敎)를 지낸 유초환(兪初煥)공이다. 인흥서원의 액자(額字)의 글씨는 역시 응와 이원조(凝窩 李源祚)공이었고, 숭봉문(崇奉門)이란 현재의 외삼문(外三門)의 편액 글씨는 후에 이 ^ 예조판서(吏 ^ 禮曹判書)를 지낸 석촌 윤용구(石邨尹用求)공의 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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