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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州高氏大同譜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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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영수 댓글 0건 조회 3,147회 작성일 15-04-13 20:18

본문

序文
세상에서 이른바 族譜니 家乘이니 하는 것이, 본시 그 起源으로 말하면 新羅時代에서도 骨品을 따지는 일이 있었고 中國에 있어서도 南北朝時代나 唐代에서부터 門閥을 崇尙해왔으니, 무엇인가 적어 傳하는 것이 있었으련만 지금에 끼친 文獻은 보이지 아니한다.
그 뒤 冊으로써 族譜를 시작한 것은 宋나라 때 蘇東坡의 부친 蘇洵으로부터요, 또 家乘이란 말은 같은 時代 黃山谷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그것도 처음에는 위로 高祖까지와 아래로는 八寸까지만 編入하는 것으로써 例規를 삼다시피 했던 것이라고 일러온다.
그러던 것이 우리나라에 와서는 그 體制가 크게 發展하여 이른바 大譜를 만드는데 까지 이른 것이며 個人의 行狀傳記와 門中의 家乘族譜등이 國史의 未備한 점을 補充하여 우리나라 傳統文化와 人物硏究에 貴重한 參考가 되는 것임은 더 말할 것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姓氏중 著姓으로 이름난 濟州高氏는 수천년의 悠久한 歷史를 간직하고 있다.
그간 高氏門中에서 星主公派, 靈谷公派, 文忠公派, 長興伯派, 花田君派, 文禎公派, 上黨君派, 良敬公派등 九派의 派譜를 각각 刊行하였거나 혹은 刊行中에 있기도 하며 마침내 各 派譜를 集大成허요 濟州高氏大同譜 上世篇을 編纂發刊함에 이르게 되었음은 실로 一大盛事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구태여 耽羅의 史料를 引用하지 않더라도 濟州高氏 一門은 耽羅의 開國始祖인 高乙那王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名門巨族인 것은 이미 세상이 널리 알고 있는 바이다.
그 始初에 관하여 高, 良, 夫 三姓神話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古文獻에 의하면 始祖 高乙那왕의 十五世孫 高厚, 高淸, 高季등 삼형제가 新羅에 入朝하여 각각 星主, 王子, 徒內등의 爵號를 받았고 그 뒤 四十五世 耽羅國 高自堅왕의 太子末老가 高麗에 入朝하여 역시 星主王子의 爵號를 받았으니 그로부터 다시 헤아려 末老를 濟州高氏의 中始祖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濟州高氏로서 內陸에 進出하여 名聲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星主公 末老의 아들 維로부터 였던 것이니 그가 처음으로 南省試에 首席으로 合格하여 벼슬이 門下侍中右僕射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兆基는 中書侍郞平章事로서 詩文으로도 鳴世했으며 또 그의 손자 適은 留摠管 兵部尙書를 지냈다.
그 뒤 中始祖 十世孫 仁旦은 耽羅指揮使, 그의 曾孫 臣傑은 戶曹典書를 역임하였고 臣傑의 第三子 鳳禮는 벼슬이 工曹參議에 이르렀으며 十五世 得宗은 朝鮮初 대표적 人物로서 漢城判尹을 지냈으며 詩文에도 뛰어났다.
이 밖에도 上黨君 恭益, 禮部尙書 良敬公 令臣, 良獻公, 興佰 仲연, 吏部尙書 文忠公慶, 上將軍 花田君 仁庇등 高麗朝에서만 九尙書 十二翰林의 名賢이 배출하였다.
한편 耽羅星主는 中始祖 末老로부터 十四世 鳳禮에 이르기까지 後孫들이 代代로 그 星主爵位를 世襲하였으니 高氏宗史는 耽羅史와 그 脈을 같이 하며 主流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이 수많은 名賢達士들을 枚擧할 겨를이 없거니와 이제 始祖로부터 무릇 九十四世, 中始祖로부터는 四十九世가 되는 오늘에 있어서는 高氏一族이 무려 五十餘萬으로 번창했으며 무릇 千餘年동안 各 時代를 통하여 혹은 道德과 文章으로 혹은 學行과 벼슬로 그리고 忠孝와 義烈등으로 國家의 棟樑이 되었던 人物들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음을 본다.
이제 高氏門中에서 公私文籍과 史料들을 널리 蒐集하고 考證을 하여 歷代 各派 人物들을 총 망라한 集大成本을 刊行하게 된 것은 실로 안으로는 祖上의 美德善行을 본받고 同一血統間의 友誼를 보다 더 敦篤히 하며 밖으로는 國家社會 발전에 功績을 남긴 偉大한 人物들을 자세히 알고 배우고 崇慕할 수 있는 좋은 敎本이 될 것이라 믿는다.
지난번 高氏中央宗門會 會長 高在旭형으로부터 上世譜 序文을 命囑받은 바 있어 이를 사양치 못하여 이 拙文을 草하는 바이다.
다만 원하건데 高氏一門의 福運이 無窮할 것을 빌고 이로써 國史硏究, 人物涉獵에 소중한 資料가 됨과 아울러 氏族끼리의 사랑으로부터 民族 全體의 큰 사랑으로 昇華되는 슬기가 생기며 또 國民總和를 이룩할 수 있는 힘의 根源이 되어 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一九七六年 十月 三日 開天節
文學博士 鷺山 李殷相



發刊辭
十年이면 江山도 變한다고 하였는데, 우리 高氏大同譜編纂委員會에서는 濟州高氏大同譜上世編을 編輯, 發刊에 着手한지 於焉 十餘年이 지난 오늘에 비로소 上梓하게 되니 참으로 感慨無量하다.
나라에는 國史가 있고 氏族에게는 族譜가 있어 各己 起源의 系統과 史蹟을 連綿히 後世에 傳承케 하는 것은 東西古今의 文化的 傳統이다.
우리 高氏는 耽羅國王孫으로서 半萬年의 悠久한 歷史를 가지고 있으며 高麗史에 太祖二十一年 戊戌十二月에 耽羅國王 高自堅의 太子 末老가 入朝하여 星主王子의 爵號를 받았다고 하였다.
高乙羅王의 四十五世孫인 自堅王의 太子 諱末老를 高氏의 中始祖로 삼고 系譜를 繼承하고 있는 바, 三國史記, 高麗史, 東文選, 耽羅志등에 史蹟이 一部 記錄되어 있으나 譜牒으로는 世宗 三十二年 庚午(一四五○)에 靈谷公 諱得宗이 編著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實本은 찾을 길이 없고 序文만이 遺傳되고 있으니 참으로 哀惜한 일이다.
그 후 景宗 四年 甲辰(一七二四)에 侍直公 諱 晦가 發刊한 四卷 世譜는 現在奎章閣에 保存하고 있으나 濟州宗派는 合譜되지 않았고 其他派도 많이 漏譜되었으며 一部 系譜誤錯 및 事績誤謬가 史的考證에 의하여 發見되므로 지난번 高氏世錄을 發刊한 뒤에 燦爛한 先祖의 事績을 史的考證에 의하여 正確히 收錄한 大同譜를 編纂하기로 發議되어 一九七三年 十二月에 高在旭會長 在任時에 濟州高氏大同譜編纂委員會를 組織하고 大同譜上世篇을 즉시 編輯 發刊에 着手하였으며 編輯全擔委員은 高京善, 高羲一, 高平奎 三人으로 選定되었다. 大同譜 各派篇은 各派 主管으로 發刊하기로 決議되었다. 大同譜 星主公派篇은 一九七四年 十月에 刊行되고 靈谷公派篇은 一九七五年 五月에, 典書公派篇은 一九七五年 九月에 花田君派篇은 一九七六年 六月에, 文忠公派篇은 一九七六年 九月에, 또 文忠公派篇은 一九七八年 二月에, 長興伯派篇은 一九八○年 五月에, 上黨君派篇은 一九八○年 九月에, 上黨君派北靑系篇은 一九八二年 三月에 刊行되었으며, 文禎公派篇 및 良敬公派篇은 于今 未刊行中에 있다.
大同譜上世篇 編輯過程에는 史的考證등 여러 가지 事情으로 時日이 遲延되었는데 高在旭編纂委員長이 一九七六年 六月 二十二日 不意에 別世함으로 인하여 一時 中斷되었으며 그 다음 高雄 委員長이 就任하여 編輯發刊을 繼續 推進하던중 一九七七年 五월 二十九日 역시 不意의 別世로 인하여 編輯原稿는 다 整理되었으나 發刊經費관계 등으로 부득이 中斷되었다.
高興門委員長 在任時에도 發刊하려고 하였으나 資金마련이 아니되어 못하였으며 高亨坤委員長 在任時에도 또한 發刊을 하려고 試圖하였으나 역시 資金事情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一九八二年 三月 二十二日에 高京善 編輯全擔委員이 別世하였으므로 高柄孝氏를 補選하였다. 一九八二年 七月에 本人이 委員長을 맡게 되어서 그간의 經緯를 검토하여 본바 사실 그 責任이 重且大함을 느꼈다. 그 理由는 全國 僉宗으로부터 十年前에 大同譜上世篇 申請代金을 全部 받아 쓰고 于今까지 發刊 配本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旣히 申請者들의 配本督促은 連續 不絶하는 狀態로서 첫째, 發刊費를 마련해서 速히 發刊하는 것이 宿題로서 苦心하던중 在日本 高昌宗 族丈이 우리 委員會가 苦心하고 있는 事情을 알고 發刊印刷費등의 巨額을 負擔하겠다는 제의가 있어서 本 委員會에서는 그 崇曺敦宗의 큰 뜻을 감사히 받아드려 發刊印刷에 着手하게 된 것이다.
本 委員會에서는 旣히 脫稿한 編輯原稿를 再整備하고 印刷에 着手하게 된 것을 千萬多幸으로 思料하는 바이다.
앞으로 大同譜上世篇과 各派篇을 合하여 集大成하면 完全한 大同譜가 되는 것이니 우리 宗門의 기쁨이며 자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發刊印刷費를 全擔사여 주신 高昌宗 族丈에 대하여 僉宗과 함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編輯을 全擔한 여러분과 實務를 擔當하신 여러분의 勞苦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면서 그간 發刊의 經緯를 略記하는 바이다.
一九八三年 十月  日
濟州高氏大同譜編纂委員會
委員長 高在珌


高良夫 三姓神話
東 ․ 西洋의 어느 나라 역사를 막론하고 太初에 관하여는 神話, 傳說로서 시작되고 있으며 특히 開國始祖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神異한 說話가 따르기 마련이다.
三姓神話는 오랜 옛날부터 口傳, 또는 文獻上으로 널리 알려진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제주도의 開闢說話로서 高 ․ 良 ․ 夫삼신인의 誕生, 三公主의 來到, 耽羅國의 건국 등에 관한 이야기가 중요한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우리 고대 사외의 開國始祖의 유래 및 출생에 관한 說話는 다음과 같이 다섯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韓國史 古代篇參照)
一, 天神族說…桓雄說話, 北夫餘解慕漱傳說
二, 地神族說…酉述聖母說話, 濟州島의 三姓說話
三, 天地兩神族說…檀君 및 大伽倻始祖傳說
四, 外來族說…箕子東來說, 昔脫解傳說
五, 卵生說…朱蒙, 赫居世, 昔脫解, 閼智, 首露傳說
이러한 분류에 따른다면 제주도의 高 ․ 良 ․ 夫 삼성시조에 관한 설화는 三神人이 땅속에서 나왔으므로 地神族說에 속한다.
高 ․ 良 ․ 夫 삼성의 시조 탄생 설화는 三神思想에서 유래된 것으로 곧 阿期達社會, 古代朝鮮의 桓因, 桓雄, 檀君등 三聖說話나 또는 신라의 朴 ․ 昔 ․ 金 삼성의 시조 설화와도 맥을 같이 하는바 특히 高 ․ 良 ․ 夫 삼신인이 땅속에서 湧出하였다는 것은 어느 나라 신화 전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신비로운 점이 있다.
一, 三姓神話의 考察
三姓神話의 형태는 男神들의 從地湧出, 遊獵과 皮衣肉食, 射矢卜地등의 토착적인 狩獵文化性과 女神들의 송아지, 망아지, 五穀의 종자 등을 가진 後來 農耕文化性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民俗學說에 의하면 이러한 형태들은 현전하는 堂神 본풀이들의 기본 모티브들이기 때문에 이 신화가 고대의 巫歌들을 기록 정착 시킨데서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韓國民俗學槪說 參照)
이러한 三姓神話는 우리나라 建國神話와 함께 일반적으로 황당무계하다 하여 비판받기 쉬우나 이는 우리 민족의 思想的 출발의 單一性과 統一性과 融和性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시 되고 신성시 되고 있다.
특히 제주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진 絶海孤島의 자연 환경 속에서도 제주도민의 순수한 鄕土愛 정신으로서 三姓池, 三射石 등 신화상의 遺蹟地를 지금까지 훌륭히 보존 되어 왔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三姓神話는 제주도의 歷史的, 文化的인 根源이 되었으며 오늘까지 면면히 이어온 精神的, 思想的인 바탕이 되었다고 하겠다.
三姓神話를 고찰하는데 크게 나누어 一, 高 ․ 良 ․ 夫 삼신인의 湧出 二, 三公主의 來到 三, 領地設定 四, 耽羅의 건국 등 몇 가지 중요한 사건별로 구분할 수 있다.
三姓神話는 어느 시대에 이르러서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옛날부터 自然的 人文的 환경 속에서 형성되어 면면히 口傳되어 왔고 또한 각종 文獻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널리 전해오고 있다.
三姓神話에 관하여 가장 자세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문헌은 제주도 역사의 最高本이고 正史本이라 할 수 있는 瀛洲誌는 고려말에 편찬된 것으로서 그 후 耽羅史에 관하여 조선조에 편찬된 高麗史 地理志, 世宗實錄地理志등 각종 문헌은 瀛洲誌를 參考하고 인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제 瀛洲誌를 근거로 하여 삼성신화를 분류, 고찰해 보고자 한다.
二, 高 ․ 良 ․ 夫 三神人의 湧出
『瀛洲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는데 홀연히 三神人이 한라산 북쪽 기슭 毛興穴에서 솟아 났다. 長은 高乙那 ․ 夫乙那라 하였다.
그들의 용모는 매우 크고 비범한 모습이었다. 늘 가죽옷을 입고 고기만을 먹으며 바다 고기잡이와 사냥으로 일을 삼고 살았다.』
「瀛洲 太初 無人物也 忽有三神人 從地湧出鎭山北麓 有穴曰 毛興, 長曰高乙那 次曰良乙那 三曰夫乙那 狀貌甚偉器度寬豁 絶無人世之態也 皮衣肉食常以遊獵爲事不成家業矣」
이상은 瀛洲誌에 수록된 三姓神話의 처음 시작되는 대목으로서 그 중요한 줄거리는 高 ․ 良 ․ 夫 삼신인이 탄생한 후 수렵과 어로의 原始生活을 하였다는 것으로 이는 제주도 인류 역사와 始初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三神人은 工乙那, 良乙那, 夫乙那라고 하는바 이들은 제주도 최초의 원주민이며 토착지배 씨족으로서 협동하여 耽羅國을 건설하였으며 濟州를 本貫으로 하는 高氏, 梁氏, 夫氏 삼성의 始祖가 되기도 한다.
삼성인은 姓은 각각 다르나 乙那라 하여 이름은 공통적으로 같이 사용하고 있으니(일명 三乙那라고 함) 乙那라 함은 「얼라」, 「알라」등 童神을 뜻한다 하고 또 氏族社會에서의 씨족을 대표하는 氏族長을 말한다고 하는바 현전하는 堂神 본풀이에서는 「할아방」으로도 풀이하고 있다고 한다.
李殷相의 說에 의하면 高乙那(KALNE=)는 (높은이=崇高=君)의 뜻. 良乙那(ALNE=)는 (어진이=善良=臣)의 뜻, 夫乙那(BALNE=)는 (밝은이=光明=民)의 뜻이 된다고 하였다.
三, 三姓穴(毛興穴)
한편 神話上의 유적지인 三姓穴(毛興穴)은 유서 깊은 하나의 聖域으로서 지금까지 보조되어 왔으니 이곳은 高 ․ 良 ․ 夫 삼신인이 태어난 곳이고 생활을 시작한 根據地로서 제주도 최초의 人類文化의 發祥地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삼성혈은 品字形으로서 上穴은 高乙那, 左穴은 良乙那, 右穴은 夫乙那가 솟아난 곳이라고 하며 그 둘레는 六자, 깊이는 바다까지 통한다고 한다.
三姓穴이란 三姓이 태어난  穴이라 하여 불려진 이름으로 일명 毛興穴이라고도 하는바 毛자는 三乙那에서 「三」자와 「乙」자를 취하여 만든 것이 변형되었다 하며 興자는 三乙那가 일어난(興起)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三姓穴을 삼성신화의 根元的이고 자연 발생적인 하나의 母體라고 한다면 高 ․ 良 ․ 夫 삼성인은 같은 혈에서 태어나고 같이 생활한 공동운명체로서 血綠的 관계가 있는 형제간이라 볼수도 있다.
(註) 三姓穴, 三射石등 神話上의 遺蹟地가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왔음은 傳統文化에 대한 濟州民의 애착심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四, 三公主의 到來
『어느날 세 신인은 함께 한라산에 올라가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니 자주빛 진흙으로 감싸 놓은 나무상자 하나가 동쪽 바닷가에 떠 내려와 머물고 떠내려가지 않는 것을 발견하였다. 세 신인은 그 곳으로 내려가 이 상자를 열어 보니, 그 속에는 새알 모양의 이쁜 구슬로 만든 상자가 또 하나 있었고, 자주빛 옷에 관대를 띠어 입은 한 사람의 使者가 따라와 있었다. 그 五函을 열어 본즉, 푸른 옷을 입은 三神女가 나왔는데, 나이는 십오륙세요, 모두 속세를 벗어난 용모에 아릿 따왔으며, 망아지와 송아지, 그리고 五穀의 씨앗도 가지고 왔었는데, 이를 金塘의 해변가에 내려놓았다. 세 신인은 모두 즐거워서 말하기를 「나는 동쪽바다 벽랑국의 使臣이온데 우리 임금께서 세 公主를 낳으시고, 나이가 다 성숙하여 짐에도 이들이 배우자를 얻지 못해서 탄식한지가 한 해 동안이 더 되었는데, 요즈음 우리 임금께서 紫霄閣에 오르시고 서쪽바다의 기상을 바라 보시더니, 자주빛 기운이 하늘을 이어 상서로운 빛이 서리는 것을 보시고, 神子 셋이 높은 산봉우리(절악 : 絶岳)에 내려와 있어서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고 있으나 배필이 엎음을 알고, 세 공주를 이곳으로 데려가라 하셔서 이제 당도하였으니 짝을 짓는 예를 올리시고 대업을 이루소서」라고 말을 마친 연후, 使者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
「一日 漢拏山望見紫泥封木函 自東海中浮來欲留而不취去 三人降臨就開則 內有玉函形如鳥卵有一冠帶紫衣使者隨來 開函有靑衣處子三人皆年十五, 六 容姿脫俗氣韻窃窕各修飾共坐且持駒犢五穀之種出置金塘之岸 三神人自賀曰 是天必授三人也, 使者再拜稽首曰 我東海碧浪國使也吾王生此三女年旣壯盛而求不得所耦 常以遺嘆者歲餘 頃者吾王登紫霄閣望氣于西 溟則紫氣運空瑞色홀蘢中有絶岳降神子三人 將欲開國而無配匹 於是命臣侍三女以來 宜用伉儷之禮以成大業使者忽乘雲而去莫知所之」
이상은 高 ․ 良 ․ 夫 삼신인이 皮衣肉食으로 생활하던 중 어느날 碧浪國의 三公主가 五穀의 종자와 가축 등을 가지고 바다 건너 제주땅에 도착하였다는 이야기가 중요한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三姓神話에서 나타나듯이 三神人의 출현과 三公主의 來到는 원시시대의 氏族社會를 이루는 과정을 말하며 특히 외부 세계에서 들어온 三公主는 外來族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하겠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先史時代 이래로 그 나라를 구성하는 種族이 순수한 單一種族으로 성립된 경우는 하나도 없다고 한다.
따라서 옛날 제주도의 先民도 결코 온전한 單一種族으로서 형성된 것은 아니며 처음으로 三姓人이 출현한 후 오랜 기간을 거쳐 점차적으로 여러 방면에서 流入한 종족들로 구성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같이 三公主의 내도와 그 후대에 여러 방면에서 유입한 종족들은 탐라의 先民인 三姓氏族과 혈통이 교류되면서 固有한 언어와 習俗 등이 동화 융합되어 독특한 생활과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註) 일부 문헌에 主胡人을 三神人 이전의 濟州先民으로 추측하는 것은 事大主義 사상에서 유래된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五, 住居設定
『세 신인은 곧 나이 차례로 세 공주와 각각 혼인하여 물 좋고 기름진 땅을 골라 활을 쏘아 땅을 정하니, 高乙那는 第一都, 良乙那는 第二都, 夫乙那는 第三都에 자리를 정하였다. 이로부터 오곡의 씨앗을 뿌리고, 송아지, 망아지를 가꾸게 되니 드디어 인간의 세계를 이룩하여 놓았다.』
「三神人卽以潔牲告天 以年次分娶就泉甘土肥處射矢卜地 高乙那所居曰第一都 良乙那所居曰第二都 夫乙那所居曰第三都 自此以後始成産業植播五穀且牧駒犢日就富庶遂成人界矣」
즉 삼신인은 삼공주를 배필로 맞이한 후 활을 쏘아 거주할 땅을 정하였으니 高乙那는 제一도, 良乙那는 제二도, 夫乙那는 제三도에 정차가여 農耕生活를 영위하면서 새로운 社會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삼성인은 溫坪里 해안에서 삼공주를 맞이한 후 해안 근처에 있는 못(池)에서 목욕제계하고 나이 차례대로 서로 짝을 맞추어 혼례식을 올렸다고 한다. (이곳은 婚姻池라는 遺跡址로서 碑를 세워 地方記念物로 保存하고 있음)
다시 말하면 高 ․ 良 ․ 夫 삼신인은 남성으로서 地中에서 솟아났고 三公主는 여성으로서 천사와 같이 海上에서 출현하여 婚姻을 맺었으니 이는 天地와 陰陽의 조화이고 祖上의 근원을 밝히는 이치로서 符合된다고 하겠다.
삼신인은 삼공주를 配匹로 정하고 盛業을 이룬지 九백년 후 漢拏山에 올라 누가 제일 활을 잘 쏘는가 겨누어 보았다고 한다. 「三神人各自射石以試勇力」
그 결과 高乙那의 화살이 돌을 꿰뚫었고 良乙那의 화살은 화살위쪽에 붙은 깃털만이 돌에 스쳤고 夫乙那의 화살은 射的까지도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濟州市 三陽洞에 三射石의 遺跡址가 保存되고 있음)
이리하여 高乙那는 제一도(都), 良乙那는 제二도(都), 夫乙那는 제三도(都)를 차지하고 나누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즉 제一도는 一徒里 지금의 濟州市요, 제二도는 山房里 지금의 大靜이요, 제三도는 兎山里 지금의 旌義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거주지는 얼마동안 제一도(都)를 중심으로 서로 협동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후 이곳은 高氏 씨족사회의 중심지로서 제一도(都)는 자연히 발달하여 부족국가인 耽羅國의 都邑地가 되었다.
二, 耽羅의 建國
高 ․ 良 ․ 夫 삼신인이 三公主를 맞이하여 인간생활을 시작한 후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子孫들이 번창하고 생활이 향상됨에 따라 여러 氏族社會는 제一도(都)를 중심으로 하나의 部族國家를 이룩하게 되었다.
原始社會의 단위를 이룬것은 氏族이요, 씨족은 共同祖上으로부터 나온 特殊血綠團體로서 이러한 형태는 차차 地綠中心社會로 변모되었다.
氏族이 분렬하여 宗支의 관계를 이룬 경우에도 흔히 宗族(大氏族)이 支族(小氏族)을 통솔하기도 하나 大小氏族을 막론하고 각 씨족에는 반드시 한 사람의 長(族長)이 있어 통솔하고 氏族神의 제사를 주제하였다.
그러나 시대 변천과 사회발전에 따라 外敵의 침입이 발생하였으니 이들 부락의 소수 씨족만으로는 방어할 수가 없으므로 서로 攻守同盟하다 보니 三氏族이 연합하여 氏族集團보다 강대한 새로운 조직체인 部族社會를 이룩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部族社會를 구성하는 要因이 복잡해지고 커짐에 따라 필연적으로 하나의 구성체이며 結合體인 部族國家가 출연하게 되었다.
탐라 부족사회의 통솔자 즉 우두머리는 가장 강력한 氏族의 대표자 중에서 선출되었는데 이때 高乙那는 각 氏族長의 추대로 부족국가인 耽羅國(乇羅國)을 건설하고 임금이 되었다.
瀛洲誌에 耽羅의 개국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三神人이 인간세계를 이루고 九백여년이 지난 뒤에 인심이 高氏에게 모아지니 임금이 되어 乇羅國(耽羅國)을 세웠다.」
「厥後九百年之後 人心咸歸高氏 以高爲君國號乇羅」
(註) 三神人이 탄생한 후 九백여년간은 高氏, 良氏, 夫氏의 各姓氏別 氏族社會가 존속되었다고 한다.
耽羅의 건국 연대에 관하여는 시조 高乙那 왕이 인간세계를 이룩한 후 九백여년이 지났다고 하였을 뿐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耽羅國王世紀에 의하면 기원전 二三三七년경이라 하였다.
그 무렵은 檀君이 나라를 세운 때로서 일개 섬나라의 역사가 그렇게 오래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가지고 新羅, 高句麗, 百濟 삼국의 건국 연대와 비슷한 때거나 또는 훨씬 그후의 시대로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탐라의 건국 연대가 문헌상 뚜렷이 밝혀진 三國의 건국 연대보다 훨씬 앞서 있고 오래된 것으로 보는 이유는 탐라의 건국을 部族國家로서 성립한 시대부터 보는데 비하여 三國의 건국은 古代國家로서 성립한 시대부터 보기 때문이라 하겠다.
즉 국가의 발달단계는 먼저 部族國家가 형성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나중에 형성된 것이 古代國家인 것이다.
部族國家의 특색은 部族聯盟體로서 部族長의 지위가 독자적이었으며 사회적 형태는 血綠社會였다고 한다.
한편 古代國家의 특색은 왕권의 강화와 동시에 世襲制度가 이루어지고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외었다고 한다.
이러한 국가형태의 변천과정을 통하여 본다면 탐라는 시조 高乙那 왕이 나라를 세운 것은 部族國家의 형태로서 그후 新羅初 十五세손 高厚왕에 이르러 古代國家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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