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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주지씨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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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상렬 댓글 1건 조회 5,579회 작성일 09-04-08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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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주지씨 문성공 지원부의 26대손입니다.


왜 충주지씨 세거지였다고 기록이 왜 할까요?

분명히 아랫글보면 있습니니다. 池씨는 충주 단일본 절대 아닙니다.


지씨(池氏)는 조선씨족통보」 에는 지씨의 본관을 89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충주, 울진, 경주, 청주, 단양, 광주 6본으로 전한다. 그들은 아직 정확한 문헌이 없기 때문에 고증하기가 어렵다

 

각각 울진지씨, 경주지씨, 충주지씨, 청주지씨, 단양지씨, 광주지씨 대종회을 따로 한다.



경주지씨의 유래

시조 문성공 지원부이며 중시조 충의공 지용도이다. 문성공 지원부의 사위인 정숙은 해주정
씨 시조이다.

시조 문성공 지원부의 선조은 아직 활실히 않고 있다.

충주지씨에서 갈려져 왔으며 설과 또다른 지씨성을 중국에서 귀화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시조 우사간 지원부는 도시조 지경의 후손었으나 몇대손인지 정확한 문헌 없어 고증하기가 어
렵다.
시조로부터 충무공 지용수의 조부 지원부까지의 약 300~400년의 상계는 확실치 않고 있다.
현재 충주지씨 대동보에 실려있는 지원부 계보도는 잘못된 정보이며 아직 고증이 안되는 부분
이다.

중시조 충의공 지용도이다.
공은 서북면(西北面) 상원수(上元帥)로 거제(巨濟) 고성(固城)에 처들어온 왜적(倭賊)을 격퇴
하고 1356년 금병(金兵)의 침입을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나아가 크게 격파하였
다. 공민왕 7년에 내사시 문하평장사(內史寺 門下平章事)겸 이부랑 판혜덕부사(吏部郞 判惠德
府事)가 되었고, 1364년 역적 최유(崔濡)가 요동으로부터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의주(義
州)를 포위하니 아우 충무공(忠武公) 지용수(池龍壽)와 함께 나아가 물리쳤으며 경주부원군
에 봉해져 후손들이 경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문과급제자 1명을 배출했다.

충의공 지용도의 6세손 세조(世祖) 때 충청절제사(忠淸節制使)로 단종(端宗)을 복위하려다 화
(禍)를 입은 지정이다. 지정은 본래 이름은 지봉원이며 우의정 정분의 생질이다. 공은 1444년
(세종 26) 삼군진무(三軍鎭撫)로서 경상도선위관에 차견(差遣)되어 왜구의 침입으로 소란된
민심을 무마시켰다. 그뒤 1448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로 파견되었고, 1450년(문종 즉위년)
에 입조하여 특지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발탁되었고, 다음해 첨지중추부사가 되면서 정
평도호부사(定平都護府使)를 겸직하였다. 1453년(단종 1)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어 부임
을 기다리던 중, 계유정난이 일어나면서 수양대군(首陽大君)일파에 의하여 “안평대군(安平大
君)과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논죄되어 전라도 영암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그해 조
수량(趙遂良)·안완경(安完慶)·이양(李穰)·민신(閔伸) 등과 함께 교살되었다.

그 외에도 한말(韓末)의 의병장(義兵將) 지홍문(池弘文)은 1907년 군대 해산령이 내리자 의병
(義兵)을 일으켜 강화갑곶(江華甲串)에서 일본군 1개 중대(中隊)를 격멸했으며, 만주(滿洲)
대학살 때 순국(殉國)한 지하영(池霞榮)과 함께 경주지씨(慶州池氏) 가문을 더욱 빛냈다. 경
주지씨 인구수는 1만3000여명이다.

댓글목록

지성택님의 댓글

지성택 작성일

충주가문39세손 지성택입니다
올리신 경주지씨에 관해서 잘못된부분이 있어서 연락드립니다
010-5073-9065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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